인간이라는 종은...서로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살도록 설계되었던 거지.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진짜 동기를 숨긴 채 살아간다.
덩샤오핑 식으로 말하자면 흰고양이나 검은 고양이나 하는 짓은 똑같다.
우리가 이 역겨운 땅으로 돌아온 것은 그 역겨움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4개의 문장이 남았다. 아직까지도 단편선을 쓰면, 한 문장이 남는다. 그 문장을 위해서 A4 한장 가득 구성을 고민하고 글을 쓴다. 그래도 그 한 문장이 뿌듯해서 계속쓴다. 5월은 여러모로 힘든 달이었던 것 같다.
단편선에서 문장의 한계를 많이 느꼈다. 상당히 조잡했다. 그래서 창조의 어머니는 모방이라는 격언을 따라 소설책을 하염없이 읽었다. 처음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1,2를 읽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베르나르의 소설은 쉽게 읽힌다. 그런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지만, 감각적인 문장은 보이지 않았다. 잘 쓴 동화책 느낌이 강했다. 조금 더 강하게 몰입하고, 그 감정선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같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런 정보도 좋지만, 감정선이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살아있었다. 래생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그로부터 발생되는 감정 하나 하나가 너무나 좋았다. 잘 쓴 책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 지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타임 라인을 설정하고, 거기 위에 인물이 뛰어 다니고, 그 모습을 상세히 관찰해 낸다. 고속도로 옆에 보이는 배경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 하나를 전부 담아내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 감정은 어떻게 깊어질 수 있었는가? 24시간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듯이 소설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좋았던 점은 ‘죽이는 자’와 ‘죽는 자’에 대한 수평적 팽창에서 나오는 마찰 때문이다. 통상은 죽어가는 자에 대해서 다룬다. 아니면 죽이는 자에 대해서 다룬다. 한쪽에 치우치기 때문에, 죽음을 단순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 사이지점에 대한 통찰을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보여준다. 죽이는 자가 동시에 죽는 자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나도 모르는 새에 래생이 살았으면 했다. 자꾸만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데, 죽음 앞에서 멈추기를 기대했다. 그렇지만 래생은 이름그대로 갔다. 삶이 오듯이, 죽음이 왔을 때 초연히 받아들였다. 그 복잡한 감정에 처음에는 작가를 감탄했다가, 다시 돌아가 래생의 인생에 대해 물음이 들었다. 우리는 이런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누군가의 삶을 난도질 하며 다니는 것은 아닐까. 그런 행위에 무덤덤해진 것은 아닌가. 우리는 그런 익숙함을 되돌릴 수 있을까. 과거가 없어진 곳에 새롭게 시작해야할까.
역겹다.
구역질이 나온다. 싫다. 지겹다. 그 모든 모순 속에서 존재를 잃지 않아야 한다. 부단히 옳은 방향을 끊임없이 숙고하고, 그 고민속에서 살아야 한다. 지겨운 삶 속에서 새로움을 잃지 않아야 한다.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기 위해 항상 지식을 탐닉하고, 정보의 풀을 넓혀야 한다. 아마 그래도 나는 누군가의 삶을 난도질할 것이다. 그래도 그런 행동을 최소화 하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 적어도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의 핸들을 잡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핸들을 돌릴 수 있을 때까지.
아직도 머리가 따갑다. 래생이 나에게 너무나 무거운 문제를 던진 채 사라졌다.
'wat sub!' 카테고리의 다른 글
wat sub! - 3분기 결산 (0) | 2019.09.28 |
---|---|
wat sub!- 2분기 결산 (0) | 2019.07.27 |
wat sub! - 청소 (0) | 2019.05.02 |
wat sub! - 500일간의 썸머 (0) | 2019.04.27 |
wat sub! - base ball (0) | 2019.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