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단편선 - 꿈
햇빛이 아스팔트에 부딪혀 창문을 때렸다. 세진은 얼굴을 찡그리며 커튼을 쳤다. 스탠드를 키고, 물통에 있는 물을 들이켰다. 갈증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부엌과 거실을 바라봤다. 여느 가족과 다름없어 보였다. TV에서는 야구중계가 흘러나오고, 중년 남성이 소파에 누워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통을 꺼내 사그라 들지 않았던 갈증을 해소했다. 소파에 노워있던 중년의 남자가 세진을 보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세진아 사과 좀 깍아라.' 세진을 돌아서서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사과를 냉장고에서 꺼내 싱크대에서 흐르는 물로 씼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야구 중계를 틀어놓고 소파에 붙어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아무래도 3차 정리해고의 슬픔이 커 보였다. 1차, 2차에서 살아남았기에 그만큼 회사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희망이 컸다. 그렇게 책상을 빼고 퇴직금을 받은 채로 30년동안 일한 회사 문을 나섰다. 회사 이후의 미래는 그리지도 못했던 것 같았다. 돈을 쓰레기통에 던지듯이 썼다. 힘들게 벌어서 해프게 쓰는구나. 자신도 30~40년을 살게 된다면 저런 마음이 들까 세진은 두려웠다. 사과는 아버지의 고향에서 가끔씩 올라왔다. 그때마다 궁금했다. 사과를 주고 싶을까. 사과를 반으로 쪼개고 또 쪼개고 쪼개어서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거실 탁자 위에 올려 놨다. 아버지가 말했다. '세진아, 포크' 세진은 부엌으로 다시 가 포크를 가져다줬다. 그리고 자신이 먹을 사과를 가지고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접시를 올려 두고 의자에 앉았다. 안방의 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다. 아버지가 이불을 펴 달라고 하지 않는다면,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안방에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건 없었다. 장롱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목수였던 외할아버지께서 직접 만드신 장롱이었다. 어머니는 그 장롱을 유난히 좋아했다. 이불 밑에 통장을 넣어두곤 했다. 지금은 이불 밖에 없고, 어머니는 없다. 엄마는 동창회에 나갔다가 바람이 나 집을 나갔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사실 그때는 이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엄마는 그날 시장에 장보러 가듯이 집을 나섰다. 언제쯤 돌아온다는 말은 없었다. 그렇지만 방에 있던 나를 보며 인사를 하고 갔다.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한없이 기다렸다. 초인종이 울리면 세진은 현관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서 문을 열어주려고 했다. 아버지에게 물었다. 엄마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아버지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장보러 갔으니깐 곧 오겠지.' 세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제 장보러 나간 사람이 오늘 안 들어왔다구요.' 아버지는 핸드폰에 눈을 처 박고서는 말했다. '친정 갔다 오는 거겠지.' '외할머니, 할아버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잖아.' 아버지가 나를 위아래로 슥 훑어봤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렇게 새벽녘이 지나가고, 아침이 왔다. 그리고 엄마는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군가 엄마를 사랑해준다면, 그쯤에서 만족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집안이 이 꼴이라면 자신도 그랬을 거라고 세진은 생각했다.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입에서 쓴맛이 베어 나왔다. 살짝 상한 것 같았다. 엄마의 빈자리는 세진과 여동생이 채웠다. 여동생은 학교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서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갰다. 세진은 빨래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카페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먹을 것을 사왔다.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싶었지만 그런 형편이 아니었다. 알바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지만, 생활이 나아지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숨만 쉬어도 아버지의 손가락 한 번에 빚이 쌓여만 갔다 지출 계획서를 다시 살펴봤다. 아버지가 집문서만 걸지 않는다면 여동생과 세진이 사는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상속포기를 하게 되면 자신들에게 채워진 족쇄는 풀린 것만 같았다. 근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인터넷에서는 아버지가 죽어야 했다. 그래서 호적을 파버릴까 생각도 했다. 그런데 집이 문제였다. 여동생의 학교가 남아있었다. 엄마에게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아버지는 잘 살아있었다. 담배도, 술도 안한 채 도박에 빠져 살았다. 신기한 게 복권은 안 샀다. 우직하게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세진은 영수증과 내역을 다시 확인하고 정리한 채로 수첩을 덮었다. 한끼당 2천원을 넘게 사용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컵라면에 삼각김밥 두개를 점심으로 먹었다. 그래도 가끔은 특식이 있었다. 카페에서 유통기한이 자정을 넘기며 지난 것을 가져왔다. 그냥 먹었더니 많이 퍽퍽해서 우유와 계란에 부쳐 먹었다.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처음에는 왜 그런 걸 가져가냐며 카페 사장이 궁금해했다. '이게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이 아니고, 식빵인데 먹을 수 있겠어?' 그때 세진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벌레도 굽어 먹는다는데, 식빵도 굽어 먹으면 괜찮지 않겠어요?'
여동생은 학교의 도움을 받아 점심과 저녁을 먹었다. 여동생을 위한 적금통장 한 개와, 세진 자신을 위한 적금 통장에 꼬박 꼬박 돈을 저축했다. 통장은 침대 안쪽 매트리스 밑에 두었다. 거실에 있는 아버지는 항상 돈을 잃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저녁마다 걸려오는 누군가의 전화에 연신 머리를 숙였다. 말로만 다짐했다. 도박하는 행위 자체도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물론 그 생각 중에 가족이란 존재는 철저히 배제된 것이었다. 핸드폰 요금제는 끊어버릴까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아직 아버지가 법적 대리인이었다. 본인이 해지해야만 했다. 생각의 끝자락은 언제나 아버지가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 끝났다. 여동생은 이런 상황에서도 학교생활을 성실히 해왔다. 다른 애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비싼 브랜드 옷도 자주는 아니지만 사주었다. 명절이 되면 마트에서 추가수당을 주고 2~3일 정도 알바를 모집한다. 몸이 고되긴 했어도 괜찮은 수입이었다. 그 돈으로 여동생 옷이나 신발을 사주곤 했다. 여동생은 자기가 꼭 사고 싶은 걸 참고 참다가 명절이 다가올 즈음에 넌지시 세진에게 말했다. 세진은 사과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나와 싱크대에 집어넣었다. 아버지 것도 거실에서 가져와서 집어넣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알바까지 시간이 꽤 남았다. 카페 알바는 8개월 전부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편의점에서 일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카페 통유리에 붙여진 구인 공고를 보게 되었다. 프렌차이즈 카페는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꽤나 많이 이용했다. 커피를 먹이본 결과 신맛이 강했다. 정신이 확 깼다. 이른 아침에는 미리 주문을 해둔 직장인들이 시간에 맞춰 자신들이 주문한 커피를 가져갔다. 그리고 퇴직한 할아버지 두 분은 항상 7시50분 즈음해서 신문을 보며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정리를 하고 나면 비교적 한산한 시간대가 되었다. 그러면 세진은 집으로 오고 사장님이 혼자서 카페를 담당했다. 점심시간에는 여자 알바생이 왔다. 와서는 2시간을 칼같이 근무하고 갔다. 그리고 두어시간 후에 세진이 가서 마감까지 카페에 있었다. 카페에 있을 때마다 세진은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카페를 차렸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이 카페에 투자를 해서 아버지가 점심 파트 알바를 뛰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카페 리모델링도 하고, 색다른 디저트도 연구하면서 지역 랜드마크로 거듭나면 번듯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진은 화장실에 가 머리를 감고 양치질을 했다. 잠깐의 낮잠동안 머리가 많이 눌렸다. 밖에서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온수가 나올 때까지 잠깐 동안 기다리며 세진은 초인종을 누른 사람에 호기심이 생겼다. 여동생은 알아서 들어올 것이었다. 아버지를 보러 온 사람은 고함을 지르며 문을 세게 찼으면 찼지 초인종을 누를 만큼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가 세진의 이름을 부르다 계속 누르는 초인종 소리에 못 이겨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진은 머리에 물을 묻히고,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화장실 문을 너머로 세진의 귀로 들어갔다. 사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온 것일 수 있다고 세진은 생각했다. 하긴 오랜만이었으니 두 사람 모두 아무 말 못하는 것이라고.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은 채 치약을 칫솔 위에 쭉 짰다. 그러고는 양치질을 시작했다. 거실 안으로 신발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손님인 것 같았다. 나갈 때까지 조금 천천히 양치질을 했다. 세진은 평소보다 더 어금니를 구석 구석 닦았다. 세수를 한 번 하고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나서 본 거실의 풍경은 상당히 낯설었다. 아버지는 몸 안으로 식칼이 들어가고 있었다. 한 사내가 아버지를 잡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가 튀겼다. 건장한 사내 두 명이 그 일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거실에 튄 피를 걸레로 닦고 있었다. 그 사람은 화장실에서 나오는 세진을 잠깐 동안 쳐다봤다. 이윽고 건장한 사내 두 명도 세진을 바라봤다. 걸레를 든 사내가 조용히 입가에 손을 가져 갔다. 세진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아버지의 시신을 들더니 세진에게 안방 문을 열라고 고갯짓을 했다. 그러고는 장롱에 있는 이불을 다 빼라고 말했다. 세진은 말없이 이불을 빼고 아버지의 시체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왔다. 장롱을 닫는 순간 사내가 세진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어디선가 세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아버지가 부르는 것 같았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것 같았다. 천국이라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릴 이유가 없었다. 지옥에는 자신이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이 죽었다면, 자신이 죽어서까지도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세진의 이름을 불렀다. 눈이 부셨는데, 거리는 자신의 방과 거실쯤 되어 보였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알바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오후였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버지가 세진을 바라보며 라면을 끓여 달라고 했다. TV에서는 야구 중계소리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진은 간단하게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고 얼굴에 있는 물기를 수건으로 제거했다. 그러고는 작은 크로스백에 지갑과 수첩을 챙겼다. 아버지는 다시 한번 세진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말했다. 세진은 가만히 소파에 누워있는 중년의 남자를 쳐다보다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