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단편선 - 작업실
눈이 떠진다. 방금 감았던 것 같은데. 새벽 어스름이 지고 해가 떴다. 작업실 문에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깔끔하게 입은 현수와 직접 제작한 향수 냄새가 들어온다. 현수는 자기 자신을 잘 안다. 무채색의 조합을 어떻게 입어야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신경 쓴 듯한 느낌을 주지만 무심한 느낌 또한 준다. 내가 새벽에 잡고 있던 펜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스탠드는 켜져 있다. 어렴풋이 새벽에 소파에 몸을 던졌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도 누울 자리는 잘 찾았다. 가끔 책상에서 엎드려 잤었다. 잠깐 눈만 붙이고 일어나서 작업을 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뜨면 언제나 늦은 아침이었다. 현수는 자기 책상으로 가 어제 마무리한 디자인 ppt를 보고 있었다. 저걸 다시 편집하느라 밤을 셌다.
"환기 좀 시키자. 이 무슨 냄새야 이거. 페인트
냄새는 아닌 것 같은데 사람 냄새가 나네."
"내 몸에서 나는 건가. 무슨 페인트를 여기서 찾아 임마. 컴퓨터 밖에 없는데. 오늘 수업은 몇 시에 가냐.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세수는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친구야. 밥 먹을 시간은 있을 것 같다. 빨리 가자."
약간의 기분 좋은 봄바람이 몸을 휘감는다. 태양의 뜨거움과 시원한 공기가 교차된다. 봄의 막바지이다. 동아리 식당은 제육볶음을 참 잘한다. 이름만 동아리 식당인 이곳은 아주머니 두 분이서 운영한다. 보통
제육볶음의 맛은 양념에서 결정된다. 대학교를 막 졸업한 우리가
최고급 육류만 먹을 수 없다. 양념으로라도 우리의 혀를 속여야 했다.
"역시 맛있어. "
현수가 빈 컵에 물을 채워주며 말했다."조미료가 다지 뭐. 직접 요리해서 먹고 그래라."
"ppt는 어때."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아니지?"
"아니 뭐, 앨범 커버 정도는 너 디자인으로 바꿀 순 있어. 서식은 내꺼 쓸 거야."
"니꺼라고 부를 수 있는 지 잘 모르겠다. 일단 완성시켜서 준비하자. 톤은 변경하면 안 된다."
"알겠어. 클라이언트 미팅이 몇 시지?"
"미팅 6시야. 늦지 않게 준비하자. 카피켓 가져오면 찢어버릴 거야. 이번에는 우리 것을 보여주면
된거야. 내일 모레에 또 있어"
"알겠어. 이번엔 제대로 했어 이번에는. 걱정
붙들고 수업이나 가십쇼."
작업실에 돌아오는 길에 수제 향수 가게에 들렀다. 젊은 아가씨가 운영하고 있다. 이 집은 6개월 넘기지
못하고 항상 새로운 가게가 들어왔다. 금속 공예. 타로. 그리고 이번에는 향수 가게가 들어섰다. 장사가 잘 안 되는 것이
눈에 밟혔다. 사람들은 유명한 브랜드의 향수를 쓰려고 한다. 그게
자신의 몸에 맞다고 착각한다. 대중적인 걸 팔지. 어딘가에서
맡아본 적 있다며 좋아하면서 살텐데. 누군가가 너의 향수를 사야 그 가게에서 향수를 계속 만들 수 있을
텐데. 향수 냄새가 괜찮았다. 유기농을 쓴다고 했다. 오래 오래 이 자리에서 살아남아서 이곳에 뿌리내렸으면 좋겠다. 이
특징도 없는 거리에 이런 가게의 무탈함을 비는 것이 어쩌면 과분할 수도 있다. 속된말로는 경영학적 안목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거리에는 가로수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가로수들이 이어주는 도로에 작업실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작업실로
들어가서 디퓨저를 열었다.
현수와 작업실을 같이 쓰게 된 건 월세 때문이었다. 자연 채광 같은 사치를
부리기 시작하니 서울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래서 현수와 논의 끝에 적당한
위치와 크기의 작업실을 구했다. 월세는 둘이서 반씩 부담했다. 그
부담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는 한 달에 한번은 꼭 외주, 협업을 해왔다.
그렇게 이번 달 월세를 내고, 다음 달 월세를 내기 위한 프로젝트를 수집한다. 그첫만남은 A기업 대학생 공모전 수상식에서였다. 같은 대학교임을 그제서야 알았다. 서로의 아이디어에 신선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는 없는 명암의 대비가 현수에게 있었고, 현수에게
없는 색의 온도가 나에게 있었다. 그렇게 만남이 빈번해졌다.
서로의 의견에 터치하지 않았다. 나는 나고, 현수는
현수였다. 서로의 존재를 뭉개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그런데
월세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심하게 부딪힌다. 정확하게는 의견 교환이 활발해지는 것 같다. 서로의 작품을 할 때는 서로의 것에 대한 존중이 있지만, 돈이 걸리면
클라이언트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과 개성을 표현해야 된다는 강박에 휩싸인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그냥 따로 벌어서, 따로 내자. 왜
이렇게 싸우면서 같이 하냐고. 그래도 1~2주 서로의 작업을
진행하다 보면 어느 새 함께할 다음 월세 프로젝트를 찾고 있다. 우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싸우는 건 결국 클라이언트 때문이라고.
클라이언트를 알게
된 건 대부분 선배 덕분이었다. 선배들은 우리의 가치를 이해해줬다. 우리도
그랬다고. 그렇기에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예상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은 항상 돈으로 다가왔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선배들이 은연중에 꺼내는 프로젝트에 한 번, 두 번 참여하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 삶의 한 루틴이 되었다. 클라이언트는
언제나. 심플하지만, 화려하고 꾸민 듯 안 꾸민 디자인을
원했다. 이 새끼들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심플한 걸 가지고
가면 뭘 해왔냐고 열을 내고, 화려한 걸 가지고 가면 왜 이렇게 거추장스럽냐며 열을 냈다. 그래서 그냥 대충 해줬다. 인터넷에서 한번쯤 본 디자인을 가지고
가면 좋아라 했다. 우리는 티끌 같은 존재였다.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저 대학교를 졸업한, 젊은, 디자이너. 우리는 언제나 말단 사원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말단 사원이 해결하면 되는 하청 직원쯤이었다. 우리의 명함을
받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뭐가 그리 급한 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연락처 하나 주세요.”
그럴
때마다 아무 말 않은 채 그들을 빤히 쳐다봤다. 그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들은 우리를 쳐다봤다. 그들에게 필요한 디자인은 유일한 디자인이 아니다. 유명한
디자인이면 충분했다. 현수도 나도, 그게 싫었다. 이 새끼들은 디자인을 지들 똥 닦는 휴지로 본다고. 아무거나 가져다
써도 똥만 닦으면 되는 줄 안다. 이런 애들이 무슨 예술을 알아. 거창한
건 아니지만, 때와 장소에 맞아야지.
스치듯 지나가게 해서 꼭 돈 벌면 이딴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b기업 디자인 어워드에서
장려상을 받은 디자인을 카피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면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약간의 해체주의적 심미성을 강조한 디자인. 나조차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저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돈만 받고,
디자인을 쓰면 되니깐.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다. 더군다나
저들이 이걸 원한다. ppt가 프린터기로 나오고 있다. 한
부는 클라이언트에게 주고, 나머지 한 부는 발표 가이드북으로 채운다.
현수의 피드백을 약간 반영했다. 그래도 틀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현수의 아이디어는 잘 담아냈다. 자세히 보아야 한다. 어쨌거나 장려상을 카피해서 만들어낸 디자인은 이게 유일하지 않겠는가.
현수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작업실로 들어온다. 디자인 ppt를 본다.
”디퓨저 어디서 산거야? 은은한 걸로 잘 샀네. 그런
거 알지. 너무 향기가 강해서 숨막히는 거. 치명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진짜 숨이 안 쉬어지는 것들.”
“동아리 식당 근처에 있는 수제 향수 가게에서 샀어. 괜찮지?”
눈살을 찌푸리고 ppt 한 번, 나 한 번 그리고
한숨 한 번을 쉰다. “디퓨저는 문제가 없어.”
그래도 반응이 나쁘지 않다.
ppt를 바닥으로 집어 던지지 않았다. 함께 강남에 있는 클라이언트 회사에 간다. 미팅은 변경점 1,2,3을 얻기 위해 시작된다. 그러면 총 3가지 최종안이 나오고,
보통 그 중에서 결제가 난 변경안이 확정이 되고 대중들에게 소비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작업물이 소비되는 것을 보면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약간의 요청이 있었고, 앨범 커버가 완전히 엎어졌다. 현수는 아무 말없이, 요청안을 검토한다. 다음 주에 다시 미팅 날짜를 잡고, 돌아오는 버스를 탄다. 현수가 나에게 묻는다.
"안 지치지. 너는 이게 하고 싶은 거지."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에 약간의 해체주의적 심미성을 강조한 디자인이지."
현수가 율무차를 마시며 묻는다. "점심에 끝난 거 아니였어? 너 이거 2020 S/S 시즌 카피지? 색만 다르지 명암이 똑같은데"
"색감이 다르지, 모양도 다르고. 결국
여기서 차이가 발생하는 거지."
"이렇게 카피캣 만들고 돈 벌면 동업자로서 안 미안하니?"
"그들도 내가 유명해지면 나를 따라하겠지. 이 바닥이 그런 거지."
"언제부터 그랬던 건데. 너 이래서 나중에 어떻게 니 브랜드를 차린다는 건데. 너가 이러면, 나중에 대중들이 너만 보고 따라올까? 너를 인정해줄까? 니가 유명해지고 나서도 이러지 않을 수 있을까?"
"굶어 죽겠는데 어떡해. 무인도에서 무한 동력 만들어봐. 누가 알아쥐나 할까? 몰라. 모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상태까지는 와야지. 우리 이거
아니면 월세 내기도 힘들잖아. 너나 나나 작업물 전시하기도 힘든 게 우린데. 여기서 절대 끝내고 싶지는 않아. 일단 오늘은 집에 가서
쉬고, 내일 다시 보자. 나는 작업실 들렀다가 갈게."
작업실 문을 여니, 수제 향수집에서 산 향수 냄새가 작업실을 맴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페인트 냄새는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밑에 집에서 페인트 작업을 한다고 양해를 구했었던 게 생각이 났다.
페인트 냄새가 강하면 머리가 띵했다. 아무래도 화학 성분이 들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화이트 보드에 이번 미팅으로 확정된 변경점을 마커로 적었다. 변경은
해주는데,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 일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신다. 시원하다. 작업실에는 책상 두개, 화이트 보드 한 개, 소파 한 개에 작은 간이 냉장고가 전부이다. 그래도 이 작업실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물론 이상적이지는 않았다. 벌써
이 공간에 익숙해져서 나태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더 이상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하는 게 목표가 아닌, 그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디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현수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컴퓨터를
키고 내일 일정을 수정했다. 오전 일정은 모두 밀어버렸다. 어차피
타인과의 약속은 없었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다
문뜩 전시회를 보고 싶어서, 국립 현대 미술관 사이트에 들어갔다. 마르셀
뒤샹의 전시회가 있었다. 그는 예술적이지 않은 것에서 예술적인 면을 찾아냈다. 그는 시대의 패러다임을 뒤집었다. 그의 인터뷰를 보니 그는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는 대중을 10년이고 50년이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현수와 나의 대중은 언제 올까. 죽기 전에 한번은
만나보고 싶은데. 그들에게 오느라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할 것 같은데. 우유 뚜껑을 꽉 조인채로 다시 간이 냉장고에 넣어뒀다. 내일 아침에 다시 먹으려면 상하지 않게 꼭 잠가 둬야 했다.